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다 카즈마사 (문단 편집) === 오프코스(オフコース, Off Course) === [[파일:attachment/off_course.png]] 이 팀을 한국 밴드에 대입을 하자면, '''일본의 [[들국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두 밴드 모두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이 포크 송을 기반한 록 위주의 노래들이었고, 주축이 되었던 두 멤버들이 오랫동안 애증관계(...)였다는 것까지도 공통점이다.] 오프 코스의 주축인 또 다른 멤버 스즈키 야스히로와는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루기 위해 다닌 학원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당시에는 음악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오다에게 스즈키는 그를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스즈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꽤 오랫동안 기타를 치며 음악을 하던 스즈키를 오다는 얼마 안 지나 뛰어 넘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다는 스즈키를 그의 '음악적 스승'으로써는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훗날 전설의 밴드가 되는 '오프 코스'의 시작이었다. 1969년 [[도호쿠대학|토호쿠대학]] 재학 시절, 아마추어 음악 생활에 끝을 맺기 위해 '디 오프코스'[* 메이저 데뷔 전에는 관사 'the'를 붙였는데, 데뷔 뒤에는 뺐다.] 명의로 [[야마하]] 뮤직 콘테스트에 토호쿠 지역 예선으로 출전했으며, '군중 속으로'란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도쿄가 아닌 지역 예선으로 출전한 이유는 도쿄라면 레벨이 높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방에서 출전하는 게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한 이유에서였는데 지역 예선도 레벨이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선 1위로 통과하여 전국 대회에 진출. 라이벌 상대는 작곡가 겸 가수인 [[자이츠 카즈오]]와 '[[날개를 주세요]]'로 유명한 '붉은 새'였다고 한다. 자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맹렬히 연습했으나 '붉은 새'가 1위를 차지하고 오프코스는 2위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우승을 하면 음악 활동을 그만 두려 했지만 2위를 하니 오기가 생겨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멤버도 있어, 몇 번의 멤버 교체를 걸쳐 1972년 기타리스트 스즈키 야스히로와 함께 'Off Course'로 메이저 데뷔를 한다. 약 1973년부터 77년까지는 사실 록그룹이라기 보다는 포크송 듀오에 가까웠다. 음악들이 쎄시봉 느낌이 상당히 난다고 할까. 사실 이 듀오 시절에는 거의 무명 수준이었다 봐도 좋다. 1976년부터 세션으로 자리잡던 드러머 오오 지로, 베이시스트 시미즈 히토시, 그리고 서브 기타리스트 마츠오 카즈히코가 1978년도부터 밴드의 정식멤버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들의 음악스타일이 포크에서 록으로 갈아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이 5인조 밴드의 호흡은 그야말로 미래에도 다시 없을 '''환상의 호흡'''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다의 호소력 짙은 보컬, 스즈키의 시원한 기타 연주, 마츠오의 ~~미친 존재감을 선보이는~~ 하모니카 연주[* 이 하모니카는 오프 코스 최대 히트곡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에서 진가를 드러낸다.]와 보조 기타 연주, 시미즈의 감칠맛 나는 베이스, 그리고 지로의 강렬한 사운드의 드럼까지, 그말로 이 시절의 오프코스는 [[진수성찬]]이었다. 1979년도에 그 유명한 '愛を止めないで(사랑을 멈추지 마요)'가 수록된 정규앨범 'Three And Two[* 상술했듯이 이 앨범 직전의 앨범까지 오프 코스는 말랑말랑한 어쿠스틱 음악 위주로 하는 듀오 그룹이었으나, 이 앨범을 기점으로 음악 스타일이 크게 변한다. 당시 앨범의 첫 트랙을 듣고 놀란 기존의 팬들도 여럿 있었을 정도.]' 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같은 해 12월 낸 싱글 'さよなら(안녕)'로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 발라드가 [[사잔 올 스타즈]]의 [[TSUNAMI]]라면, 1980년대의 일본의 대표 발라드는 이 노래라 봐도 무방하다.[* [[신승훈]]이 콘서트에서 (물론 일본어 원곡으로) 부른 적이 있어서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오리콘 1위는 못했으나, 무려 4개월 넘게 월간차트 10위 안에 들었던 곡이다. 이후 1980년도에 낸 'Yes-No', 1981년도에 낸 '言葉にできない(말로 표현 할 수 없어)[* 동방신기도 부른 적 있던 그 노래 맞다.], 'I Love You', 1982년도에 낸 'Yes-Yes-Yes'를 포함해 그들이 내는 싱글, 정규 앨범은 하나같이 히트를 쳤으며[* 이들은 [[뮤직 스테이션]] 같은 프로그램에 '''단발성 게스트로도 출연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사실상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면 이들을 TV에서 보는 건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내는 정규 앨범마다 주간 1위에다 연간 톱10 안에 항상 들었으며, 1982년에는 오리콘 연간 앨범 판매량 1위를 달성하였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는 공연마다 거의 매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오프코스는 명실상부 198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인기를 이끌었던 오프 코스 역시 주 축이 되었던 오다와 기타리스트 스즈키가 사이가 틀어지면서 조금씩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에 스즈키의 말에 의하면 1980년에 낸 정규앨범 'We Are'과 이듬해에 낸 'Over'를 합치면 We Are Over, 즉 우리는 끝났다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게 말 그대로 해체를 암시하는 제목이었다고 한다. 정작 그 두 앨범은 오프 코스 불후의 명반으로 꼽히는 음반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 하다. 그후 1983년도에 계약이 만료 되자 마자 스즈키는 탈퇴했고, 오다는 팀을 해체할까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으나 어떻게 1988년까지 유지가 되었다.] --왜 밴드들은 하나같이 이럴까?-- 사실 앨범 내에서 반반씩이었던 오다와 스즈키의 곡 분배에서 이 그룹이 5인조가 되면서부터 오다의 곡의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스즈키가 이에 대한 불만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라는 건 짐작이 가능하다.[* 사실 오프 코스의 전반적인 음악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오다가 워낙 사기캐라서 그렇지(...) 스즈키는 다른 아티스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음악적 역량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프 코스 당시 그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도 '일 억번의 밤을 넘어서', '몇 개의 별 아래에서' 등의 곡은 오다의 곡들 만큼이나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타 가수들에게도 곡을 써서 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있는 작곡가였으며, 기타리스트로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유연하게 왔다갔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심지어 당시의 라이브를 보면 오다의 보컬보다도 더욱 안정적이었던 것이 스즈키의 기타였으니... 그야말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먼치킨이라 그 재능이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과 같은 케이스다.] 그리고 5인조가 되면서부터 오다와 스즈키는 의견 불일치로 인한 충돌도 종종 있었고, 스즈키는 이 때문인지 그룹 내에서 상당한 위화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5인조 개편 이전의 포크송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던 스즈키[* 해체 이후 현재까지도 포크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음악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와 계속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려고 했던 오다의 음악적인 견해 차이까지 겹쳐서 결국 1982년도 6월 30일[* 이 공연은 무려 '''10일에 걸친 무도관 공연의 파이널'''이다. 당시 [[닛산 스타디움]], [[도쿄 돔]], SSA가 없었던 시절의 무도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이 밴드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 6월 30일은 이제 오프 코스 팬들에게는 거의 기념일처럼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6월 30일이 되면 팬들이 무도관에 모여 오프 코스의 재결성을 염원하며 합창 라이브를 개최하곤 한다.][* 여담이지만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투어의 성공으로 인하여 오프 코스는 7월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앙코르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스즈키가 오프 코스로서의 활동을 끝마치고 싶어하는 의사를 강력하게 밝히는 바람에 불발되었다고 한다.]에 있었던 그 전설의 라이브, [[무도관]]에서의 라이브[* 유튜브 등지의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 라이브 맞다. 참고로 이 공연의 막바지에서 드러머를 제외한 멤버 4명이 마이크 하나로 함께 그들의 대표곡인 Yes-No를 함께 웃으며 부르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든다.]를 끝으로 5인조로서의 활동은 사실상 끝이었고, 결국 1983년에 스즈키는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 되자마자 팀을 탈퇴하고 말았다. 계약 만료 후 스즈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약 1년간 활동을 중단하고, 해체를 심각하게 고려하던 중이었으나[* 오다는 스즈키 없는 오프 코스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해산을 희망하였으며, 스즈키 탈퇴 이후 오프 코스는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1984년에 새 소속사와 계약 후 4인조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음악은 여러 부분에서 굉장히 실험적인 도전을 하였고 대중들 역시 그들이 도전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어, 그들은 예전과 다름없는 인기를 구가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미국 진출을 위한 영어 노래들만을 실은 음반 'Back Street of Tokyo'를 발매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만 보면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노래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이 당시 노래들의 비중은 다소 적은 것이 사실. 정규 앨범들 또한 주간 1위를 하긴 했었으나 대부분 단발성이었다. 절정에 달했던 이 밴드의 호흡은 1982년을 거쳐 스즈키가 탈퇴한 후 그 시너지가 많이 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 hmv의 평론가 또한 오다 카즈마사라는 뮤지션은 대단하다고 인정하지만, '오프 코스'라는 밴드 내에서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만 봐도 스즈키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영국 밴드 [[퀸]]이 [[Hot Space]] 이후 4~5년간 저조했던 것과 대응되는 시기라고 보면 된다. 그나마 베스트 앨범에 계속 실리는 건 1988년에 낸 그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노래였던 '君住む街へ(네가 있는 거리에)'. 이렇게 10년 넘게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1988년에 마지막 정규앨범 'Still a Long Way to Go'를 내고 해체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이후 오다와 스즈키는 솔로 활동으로 커리어를 쌓았고, 오다는 이후 한 음악활동들이 족족 성공하면서 일본의 국민가수로 자리 잡았다. 오다와 스즈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는 90년대 중반 들어 비틀즈 카피밴드로 재결성을 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어째서인지 오다와 스즈키를 포함한 완전체로는 해체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번도 재결성이 된 적이 없다. 오다와 스즈키 역시 그 시절 노래들을 부르면서도 재결성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재결성 언급을 아예 안 하는 오다와는 달리, 스즈키는 재결성에 어느 정도는 관심이 있는 듯 한지 가끔 라디오나 TV에 나와서 재결성에 관해서 진지하게 얘기를 하곤 한다. 실제로도 오다와 스즈키는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는지 서로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고 한다고 한다. 스즈키는 이미 약 30년 전 오프코스 해체 직후 낸 자서전에서 '오다에 관한 악감정은 이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드디어 비록 영상 통화의 형식이긴 하였으나 오다와 스즈키가 방송에서 함께 라이브를 펼치기도 하였다! 오프 코스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영광의 순간. 해체 이후에도 재결합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밴드 중 하나이다. 그 증거로 매년 6월 30일만 되면 오프 코스의 팬들이 무도관에 모여 합창 라이브를 개최한다. 심지어 2017년[* 5인조 마지막 공연일로부터 정확히 '''35년'''이 되는 해이다.]에는 6월 30일에 5명의 멤버를 무도관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하려는 팬들의 시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팬들의 염원과는 다르게 주축인 오다와 스즈키가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못을 박아놓은 상태라 슬프지만 현재 재결합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멤버들이 전원 살아있음에도 재결합이 힘든 현실-- 2019년은 오프 코스의 결성 5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팬들은 50주년 재결합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해체된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 앨범이 나올 때마다 잘 팔려나가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2019년에 라는 커버 모음집이 발매되었는데, 여기에 [[카미시라이시 모네]], [[성시경]] 등 꽤나 쟁쟁한 가수들이 참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